전력망은 왜 ‘완전 자동’이 될 수 없을까 —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없는 물리 시스템의 한계

우리는 많은 시스템이 자동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장은 자동으로 돌아가고, 자동차는 스스로 운전하며, 알고리즘은 사람보다 빠르게 판단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전력망도 완전히 자동으로 운영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전력 시스템은 끝내 완전 자동화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력망이 가진 물리 시스템의 성격 때문이다.


1. 전력망은 계산 문제가 아니라 물리 문제다

많은 자동화 시스템은 명확한 규칙과 입력값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전력망은 단순한 계산 시스템이 아니다.
전력망은 전압, 주파수, 관성, 열, 기계적 응력이 동시에 얽힌 실시간 물리 시스템이다. 모든 변수를 완벽하게 모델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어렵다.


2. 전력망에서는 항상 예외 상황이 발생한다

자동화가 잘 작동하려면 “대부분의 상황”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력망에서는 예외가 일상이다. 갑작스러운 설비 고장, 기상 변화, 예상 밖의 수요 급증은 늘 발생한다. 이 모든 경우를 사전에 규칙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3. 자동 제어는 빠르지만,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동 제어 시스템은 특정 신호에 매우 빠르게 반응한다. 주파수가 떨어지면 출력을 올리고, 전압이 높아지면 차단한다.
문제는 이런 반응이 왜 일어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동일한 신호라도 원인에 따라 최적의 대응은 달라질 수 있다.


4. 잘못된 자동 반응은 연쇄 붕괴를 부른다

전력망 사고의 상당수는 고장 그 자체보다 잘못된 보호 동작에서 시작된다.
자동 시스템이 상황을 과도하게 해석해 설비를 차단하면, 그 부담은 다른 설비로 전가된다. 이런 반응이 연속되면 작은 문제가 대규모 정전으로 확대된다.


5. 인간은 느리지만 ‘전체 그림’을 본다

사람은 자동 시스템보다 느리다. 하지만 인간 운영자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상황의 맥락을 판단한다.
이 고장이 일시적인지, 더 큰 문제의 신호인지, 차단이 필요한지 버텨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전력망에서는 이 판단이 시스템의 생사를 가른다.


6. 전력망의 안정성은 자동과 인간의 협업에서 나온다

전력 시스템은 자동 제어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빠른 반응은 기계가 담당하고, 큰 판단은 사람이 맡는다.
자동화는 시간을 벌어주고, 인간은 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린다. 이 역할 분담이 깨지면 시스템은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


7. 완전 자동화는 오히려 취약성을 키운다

모든 판단을 알고리즘에 맡기면 시스템은 평균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예상 밖 상황에서는 극도로 취약해진다.
전력망은 최적화보다 생존성을 우선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일부러 인간 개입의 여지를 남긴다.


8. 전력망은 기계가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이다

전력망은 물리적 장치들의 집합이지만, 동시에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 시설이다.
정전은 숫자가 아니라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판단에는 여전히 사람이 필요하다.


9. 인간이 남아 있는 이유는 실패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완벽한 자동 시스템은 실패를 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력망은 실패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이다. 인간 운영자는 그 실패를 흡수하기 위한 마지막 안전장치다.


10. 전력망은 자동화되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이다

전력망은 아직 자동화되지 않은 시스템이 아니다.
자동화될 수 없는 특성을 이해한 시스템이다.

전력망은 완전 자동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판단을 남겨두는 설계가, 대규모 시스템을 지키는 마지막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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